2024.05.20 (월)
[조대형대기자]
저 너머 사랑이야기. 누구나 저 너머의 그를 만나면 생명감에 충만한 활력을 느낀다. 나이 망륙(望六)과 지명(知命)의 원숙한 여인답지 않게 妙齡(묘령)의 젊은이에게서도..........
회고컨대, 지금의 저 너머에서 그를 지배한 것은 슬픔만은 아닌듯 싶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만큼 나는 그때 전혀 울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정직한 고백이다. 뭔가 누군가에게서 이니셔티브를 뺏겨버린 것 같은 묘한 감정이 한동안 그를 지배한 것처럼 읽혀지곤 했다. 저 너머의 상실로 인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실감하게 된 건 조금의 시간이 흘러간 날의 일이다.
때문에 어떤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무엇이나 다 되어보고 싶었고, 온갖 것을 다 사랑하고 싶었지만, 그의 삶을 경악하게 흔들어버린 사건이 발생하므로 하나의 섬이자 대륙이 되어 버렸다.떼창으로 7080세대를 불러내면서, 한갓진 카페에서 포도주를 음미하면서, 방년의 청춘들이 뛰노는 새벽 공기를 가르면서, 별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머지의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구름 사이에 걸려 있던 반달이 나의 시골 고향에서 보던 보름달보다 더 환한 이유를 체득하면서, 이것은 ‘따로, 저 너머의 것은 또 같이’ 가야만 하는, 타인의 시선으로 기록한 저 너머의 사랑이야기를 기록했다.
세상과 같이 한 역사 60여 년 차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만남에서의 헤어짐에는 여전히 보내는 사람이 치러야 할 감정의 몫이 있다. 나는 그가 마지막 모퉁이에서 꺾어져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이에 대해 내가 나에게 말했다. ‘그’는 한 번쯤 돌아볼 것이고, 또 다른 하나의 ‘그’는 그냥 들어갈 것이라고. 예상은 적중했다. ‘그’는 한 번이 아니라 두번 뒤돌아보았고, ‘나’는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켰다. 다시 내가 또 다른 나에게 말했다.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라 뒤를 돌아본 것이고, 또 다른 그는 ‘그’ 바로 통과해야 할 앞일을 생각하느라 뒤돌아보지 못한 것이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은 ‘그’가 순간에 충실한 것이고, 또 다른 ‘그’는 뒤를 돌아다볼 자신이 없어 앞만 본 것이라고.
어떻든 상관없다. 휙 하고 지나는 바람일지 모르나 ‘이유’는 이제 저 너머의 것과 하나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고, 그 시작이 ‘인연’이라는 화두였으니, 그 어느 지점에서 인연이 다한다 해도 ‘저 너머와 함께한 시간’은 부풀어지고 각색되어 관계의 재창출로 이어져갈 것이다.
지금의 서울에 봄바람이 불고 있듯이, 저 너머의 삶에도 곧 가을 바람이 들이닥칠 터이고, 그리움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몫이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채우기보다 비우기가 더 어렵다. 채우는 쪽으로 발육한 욕망의 관성 때문이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허기지는 게 욕심이지 않던가. 지긋이 나이 들어서도 사람은 때로 갈피없이 흔들린다. ‘비우기’에 능하지 않아서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게 인생인데, 시간의 분초를 통과하는 사이에 그려지는 굴곡의 궤적들. 남들 눈엔 평범해 보이는 인생에도 고유의 행적이라는게 있으며, 기복과 부침의 과거사가 서려 있게 마련이다. 저 너머에 있는 그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내가 나에게, 또 저 너머에게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일까?” 물었고, 저 너머의 답을 뒤로 미룬채 나의 답을 하나의 방정식 형식으로 풀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고, 주위에 믿을만한 사람들이 있고, 적절하게 노동을 할 수 있고, 쉼도 찾을 수 있는 여유 등 수도 없이 많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언제나 ‘희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 내일은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판도라의 상자 맨 밑바닥에 남겨져 있던 단 하나의 선물도 있다는 것 등에 대해 말이다.
한낱 저 너머의 삶에 대해......
사랑과 이별에 관한 것을 읊조린다 해도 아직은, ‘이별’은 빠져야 한다.
세상살이에서 종종 목격하는 게 어떤 일의 원인이 된 무엇인가가 정작 그 일의 진척을 막는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이지만, 이미 많은 일이 나도 모르게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고, 설렘, 두근거림, 망설임의 연장 속에서 내 눈의 앵글은 일단 그의 어둠의 것들을 배척해야 했다. 지난주 잠시 서울 강남에서그를 만났다. 아직은 매서운 봄바람이 그의 볼에 남겨 놓은 발간 흔적은 저 너머에 있는 그의 현재와 묘하게 얽혀든다.
그러나 '이게 다'일까? 누군가로부터 가해졌을 '칼에 찔린 상처는, '한가지 목표를 향해 달려오다 어느 날 돌연 길을 잃어버린 듯 한 망연자실은 또 다른 혼돈의 기록이다.
이제까지 확고하다고 믿고 있던 온갖 사실들이 정체불명의 한 가해자의 출현으로 한갓 허구로 돌변해 버린 것이다. 그는 묻는다. “왜, '가해자'는 아무런 해명도 없이 납득할 수 없는 배반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이 저 너머의 있는 사람의 누군가로부터의 가해는, 무엇을 믿는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 없게 된,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내부로의 여행임과 동시에 타인에게 다가가는 길이기도 하다.
이제까지의 그것은 저 너머에 있는 사람의 상실에 관한 정직한 기록이다. 저 너머의 그는 '칼에 찔린 상처'가 어느 누구의 가해가 아니라 자해였는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흔들림'과 '길잃음'은 여전히 사람들의 특권이다. 그러나 저 너머의 그들은 흔들리되 제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길 잃었으되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