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0 (월)
조대형대기자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그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은 지독한 인종 차별주의자들과 주지사가 간섭이니 무효니 하는 말을 떠벌리고 있는 앨라배마주에서,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이 연설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명연설로 유명한 마틴루터 킹 목사의 연설문 가운데 일부로서, 이 연설이 있는 이후 여러 지식인들에게도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인종 차별 철폐 운동에 비흑인 지식인들도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인권 법안과 차별 금지 법안 통과의 실마리를 마련하였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영어: Martin Luther King J는 1929년 1월 15일 출생하여 미국의 침례회 목사이자 인권 운동가, 흑인 해방 운동가, 권리 신장 운동가, 기독교 평화주의자로, 활동하면서 미국내 흑인의 인권 운동을 이끈 개신교 목사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로서, 196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흑인 민권신장 운동에 있어서 비폭력적이고 점진주의적인 방법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세계적인 인물로 부상한 인물이다.
오늘 2023년 4월4일은, 그의 육체가 주검이 된 1968년 4월4일을 기점으로 하여 5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1968년, 그 당시 한국엔 대한민국 경제 발전을 견인했던 기업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해로서, 1968년 첫 날을 한 달 앞둔 1967년 12월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현대자동차를 창업했다. 현대자동차 창업을 시작으로 포항제철이 1968년 4월에, 삼성전자가 1969년 1월에 출범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세 기업이 1968년을 중심으로 1년 2개월 사이에 힘찬 출발을 했다. 이 세 기업이 비슷한 때에 업을 일으킨 것을 보면 1968년이 한국 경제 도약의 원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 기업은 이후 50년 가까이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면서 각 분야에서 세계 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 대한민국도 경제대국이 됐다.
특히 1968년 1월 1일의 경향신문 머리기사는 당시 우리나라 경제 상황이 큰 전환점을 맞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날 경향신문 1면 기사의 제목은 ‘한국 첫 대외경제 원조’. 당시 기사의 첫 번째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정부는 ‘인도니시아’(표기 그대로) 재정원조로 600만달러의 차관을 공여키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차관 공여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로 크게 주목을 끌고 있으며 앞으로 대외 경제 진출에 새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전망된다.”
다른 나라의 돈을 빌려야만 했던 나라에서 다른 나라에 돈을 빌려줄 수 있는 나라로 거듭난 첫해가 바로 1968년이었지만, 국가 안보 측면에서 1968년 큰 파장을 일으켰던 사건, 이른바 소 ‘1·21사태도 1968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울진·삼척에 무장공비가 침투해 이승복 어린이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것도 1968년이다. 이승복은 삼척시의 바닷가를 통해서 대한민국으로 무단 침입한 북한의 무장간첩에 의해 12월 9일 밤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살해당했고 그의 형과 아버지는 크게 다쳤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그의 생일이었다고 한다. 이승복이 죽으면서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친 사건은 조선일보가 단독 보도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당시만 해도 한반도를 둘러싼 남북 및 열강 간의 긴장관계가 팽팽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당시의 한국의 정치는 어떠했을까?
1968년의 정치에 대항한 저항은 오랫동안 ‘68혁명’이나 ‘68(학생)운동’이라고 불렸다. ‘68혁명’이란 정명은 상황을 오해하게 만든다. ‘혁명 주체’인 청년들이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정치권력을 장악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급진 요구와 변혁 강령이 ‘그 후’에 구현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곧 “질서가 지배했다”. 그렇다고 해서 기성 체제에 대한 저항의 급진적 성격과 사회적 특징을 지운 채 그저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도 충분하지는 않다. 비록 대학생들이 저항을 이끌긴 했지만, 청소년들과 청년 노동자들의 참여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기에 ‘청년 봉기’라는 규정이 그나마 ‘1968년’의 성격에 가장 근접해 보였다. 가장 인상적인 건 새로운 정치적 급진 세대의 등장이었다는 사실과, 이것이 사실은 자유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것이라고 외쳐 댄 것과는 상이하게 북괴의 김일성 세력들이 은거하기 시작했다는 것,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한국정치에서의 김대중 김영삼이 민주화 투사라고는 했지만, 국가발전의 방해세력으로 각인될 정도로 무차별적인 반대로 허송세월을 했다는 것, 때문에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항한 김대중, 김영삼이 아니라, 국가건설 원년에 기회를 정치투쟁으로 일관한 정치인으로 비춰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글의 중심 화두인 마틴 루터 킹은 권력투쟁을 전제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다는 사실이 1968년 당시의 동서양의 정치 획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보면, 과연 한국 정치권에서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으로 통칭되는 3김 만한 군웅들이 다시 출연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본다. 그러나 답은 “아니 올시다.”이다.
3김 만한 인물들의 출연을 기대한다는 것은 작금의 청년정치 세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인데,
그들 역시 6.70년대 기성정치인들 못지 않은 야비함을 갖고 있었고, 이율배반들이 가슴 한켠에서 꿈틀대고 있다는 걸 목도했다. 필자는 그간 근 10여일 정도를 집필하지 않은 채 자중의 계기를 보내면서, 정치주변, 나의 주변들에 대해 소위 ‘백가재명, 백화제방’ 식의 꼬라지들을 관망해 왔다. 아니나 다를까 국가를 위하고, 주군을 위하고, 보수정치를 위한다는 목적 관점의 나침판만 흐트러져 산만해졌고, 화살들이 나를 비판하는 일에 정조준 되고 있었다는 걸 파악하는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온갖 억측들이 소문으로 시작해, 마치 사실인양 터미널화 되고 있을 무렵, 필자는 뱀의 허물을 벗어 버려야 하겠다는 생각과 함께, 아! 모택동이 왜 ‘백가쟁명, 백화제방’의 전술을 사용했는지를 깨달으면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게 얼마나 쾌적하고 유쾌한지...... 소위 ‘피아’ 구분을 정확히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마틴 루터 킹 서거 55주년이 되는 2023년 4월4일, 오늘은 필자 조대형이 다시 태어나는 날이기도 하다. 칼 슈미트가 말했다. 정치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 이라고 말이다. 멀리서 찾지 않아도 현대를 살아내는 사람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좌파 문재인세력의 붕괴, 좌우 극단주의 세력과 주변 강대국의 압박 속에 무기력했던 보수정치의 몰락이 있었지만 윤석열 내세워 집권세력으로 급부상, 나치즘의 대두와 같은 ‘험악한 사태’들을 끊임없이 겪고 있는 것도 작금의 정치다.
우리가 과연 도덕적인 것으로부터의 ‘선과 악’의 대립, 미학적인 것으로부터의 ‘미와 추’의 본질을 말할 수 있을까?
정치에서 본질이 대립이라는 것의 규칙적인 규준이 되듯,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의 구별과 대립을 그 본질로 삼는다고 생각하면, 그 어느 것도 배반의 쓴잔을 들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
“동지와 적이라는 특수한 대립을 다른 구별들로부터 분리시켜 독립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 속에 이미 정치적인 것의 존재로서의 사실성과 독립성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필자는 그런 점에서 55년 전 오늘, 이른바 1968년 4월4일의 자신의 육체를 주검으로 만든, 마린루터 킹의 “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를 사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