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0 (월)
조대형대기자
현진건(玄鎭健),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조선(朝鮮)시대의 작가, 소설가 겸 언론인, 독립운동가로 불리워지는 인물이다. 2023년 4월25일, 즉 80년 전 오늘, 지병이었던 폐결핵과 장결핵으로 경성부 제기동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44세 였다. 기이한 것은 공교롭게도 현진건의 동향이자 문우였던 시인 이상화도 같은 날 위암으로 대구에서 별세하였다.오늘이 바로 그가 서거(1943년 4월 25일 서거)한지 80주년이 되는 해다. 필자의 학창 시절 기억으로는, 빙허(憑虛)라는 아호가 더 빛나던 인물이었고, 그가 남긴 불멸의 역작 「운수 좋은 날」과 「술 권하는 사회」,「빈처」는 필자의 오늘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빙허 현진건은 일제 지배하의 민족의 수난적 운명에 대한 객관적인 현실 묘사를 지향한 리얼리즘의 선구자로 꼽히기도 했으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출전해 1등을 차지한 조선인 선수 손기정(孫基禎)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채 신문에 실은 사건으로(일장기 말소 사건) 기소되어 1여년간 징역을 살기도 했던 그에게서 나는 글의 맥락을 배웠고, 낭만과 애절함을 동시에 접사한 시절이 있었다. 그러 멀지않은 50여년전 나의 문학 역사를 돌아본다. 화려하게 꽃피웠던 찬란한 문명,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문명들이 머리 속에 떠오를 때마다 추억으로 되살려 지는 것은 역시 술이다. 사실 나는 주당이고, 애주가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연히 주눅이 들 정도로 술을 폭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무신론자인 나에겐 하나의 신과도 같은 존재다. 뭐 굳이 술이라는 걸 철학의 술잔에 담아 말을 하리고 하면,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 아닌가 생각한다. 제목대로 술에 관한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서 테어도어 아도르노까지, 서양철학자들의 술에 관한 언급과 일화를 담아낸 덕분에 애주가들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흥미로운 대목이 적지 않다.
술을 엄청 마신다고 해서 반드시 무절제해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불변의 명철함을 남길 수 있음을 보여준 철학자가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사람들이 어떻게 술을 마셔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취하지 않고 마실 수 있는지 물을 정도로 술을 많이, 그리고 자주 마셨지만 아무도 그가 술에 취한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건 그의 수제자인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이야기다.
반면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몽테뉴는 술 취함이란 ‘몰상식하고 난폭한 악행’으로 이어지며 정신적인 면이나 관대함도 없고, 성실함이나 신중함 또는 과학과도 섞이지 않는다고 보았다. 아울러 “음미하기보다는 목 아래로 내려보내기 위해 아무 술이나 마시는” 독일인들을 경멸했다.
내가 그토록 경멸하는 공산주의도 술에 빚지고 있다. 마르크스는 ‘라인 신문’ 편집장으로 있을 때 포도경작자들의 비참한 상황을 지면에 폭로한 적이 있으며 이런 의식이 공산주의 사상에 접목되었을 것이란 근거에서다. 마르크스 자신도 학창 시절 “수업을 빼먹고 종종 취할 때까지, 그리고 주머니의 돈이 바닥날 때까지” 마시곤 했으며, 엥겔스와 함께 ‘공산주의자 연맹’의 지원자를 뽑을 때 흠뻑 취한 채 입회시험을 실시했다고 할 정도이지만, 오늘 이 글의 주인공인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는 단순히 술에 관한 애환이나 일화만이 아니라 배경 설명, 사회적 의의 등을 담았기에 지금의 이 시대에도 유익하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르무엘 왕의 잠언 [4-7절]을 언급하여 이 글을 맺으려 한다. “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에게 마땅치 아니하고 왕에게 마땅치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에게 마땅치 않도다.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간곤(艱困)한 백성에게 공의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마음이 괴로운] 자에게 줄지어다. 그는 마시고 그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그 고통을 기억지 아니하리라. 포도주와 술은 왕에게 합당치 않다. 술이 왕에게 합당치 않은 까닭은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간곤한 백성 즉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공의를 굽게 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왕의 직무들 중에는 재판의 직무가 있다. 술은 사람을 취하게 만들고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실수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왕은 고통당하는 자를 위해 공정한 재판을 하고 불공정한 재판을 하지 않도록 술을 조심해야 한다.”고 매듭되고 있는 이 글에서 얼핏 존경해 마지않는 윤석열대통령의 모습이 오버 랩 되는 이유는 왜 일까?
윤 대통령이 정권을 잡는 데 공훈을 세운 윤핵관들과 결정적으로 가깝게 된 계기가 바로 ‘술’이다. 물론 ‘남자들의 세계’에서 술만큼 훌륭한 매개체도 없을 것입니다. 한두 잔 하다 보면 순식간에 ‘형님, 동생’이 되는 게 우리의 술 문화다. 공적인 관계가 ‘취중폭탄’의 강을 건너면서 사적인 관계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공무원’이나 ‘임원’보다 ‘형님’에게 청탁을 하게 되면 부담도 없다. 윤 대통령도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윤핵관’들에게 술잔을 열심히 돌렸고, 결국 그 ‘도원결의’는 정권을 잡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술’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매개가 공적인 영역에 들어오게 되면 그 관계가 상명하복의 ‘조폭식 위계질서’로 재정립된다는 것이고, 문제는 직언을 할 수 없게 되고 하위 보스들은 자신의 정치적 지분을 유지하기 위해 보스의 명령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된다는 점이다. 술로 맺어진 관계는 ‘취기’가 사라지면 배신과 분열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쉽다는 것을 이번 여권 내분에서 읽을 수 있다.윤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술은 소주와 맥주를 반반 조합해서 만든 ‘소맥’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이트진로사의 ‘테라’와 소주 ‘진로이즈백’을 섞은 ‘테진아’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대통령이 24시간 깨어있을 수는 없지만 전쟁 등의 위기 발생 시 가장 냉철하게 판단해야 할 몸과 정신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윤 대통령의 ‘음주 논란’은 국가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접근해 봐야 할 문제다.
윤석열 대통령은 ‘술’이라는 자신의 특장점을 앞세워 사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대통령 권좌에까지 올랐다. 그러다 보니 공적인 ‘인재 풀’이 협소했고, ‘사적 인연’과 정실인사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술이라는 느슨하고 다분히 감정적인 매개는 검사 시절에는 충분히 통할 수 있는 ‘출세의 사다리’일 수 있지만 국가 최고지도자에게는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하는 ‘독배’로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는 나는 차마 이 글에 비판적 언어들이 녹아들어 있지만, 개인 윤석열의 술의 취향에 대해서는 ‘브라보’라고 말하고 싶은 것들을 억제한다.
나에게 있어서 알콜은, 하나의 글폼이 흉측스럽지 않게 묘사되게 하기 위해서 술은 필요 불가결하다. 언어의 미학을 과거성, 현재성, 미래성으로 결론짖는데는 술만큰 좋은 것이 없다.
나만의 혈액과 맥박, 무늬와 음영으로 텅 빈 PC모니터를 채우려 자판을 두드려 대는 것도 술만큼 촉진역할을 해주는 것이 없다. 소멸된 기억의 별빛 속에서 들어마셔 대는 술은 장면마다 명작을 아로새길 뿐이다.
너절대기 싫어서 술을 강하게 배웠기 때문인지, 술을 먹으면 상대의 생리와 철리를 꿰뚫게 되는 영감도 있고, 세상사 모든 것에 대한 영광과 찬사의 꽃다발 속에 둘러싸여 삶과 죽음을 아름답게 말하고, 정신과 육체가 흐느적 거리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의 술은 하나의 마약과 같은 것이기도 한 것을, 오늘 이 글의 주체 현진건 왜 술권하는 사회에서, 국가와 주변 사회가 술을 먹지 아니하면 안되게끔 만들었다고 했을까?..... 나는 어제 어느 한 여자에 대한 사모로 하여 기분좋은 술을 마시고 이 글을 탈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