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0 (월)
조대형대기자
나를 갈무리 하는 언어적 비유의 습벽들이, 또 다른 이들에겐 역겨움을 내재하게 한다는 것을 누군가의 질박을 통해 알았다
만연되어지듯 지껄인 언어는 다른 사고를 가진 타자들에 의해 저물어 가는 나의 수, 조사들을 흔들어 놓았다 .가볍게 여겨지게 된 여자들의 비유가 나의 하찮은 조사 속에 그들어있다는 것을 누군가의 적시를 통해 알았다 이것은 기어이 저물어가는 나의 삶의 한켠을 심하게 요동치게 했다. 나였던 내가 나일지 모르는 나에게 가고 있는 타닥타닥 숨죽인 몸을 여는 붉은 문장의 태동이 있지 않고서는 어줍지 않은 언어들은 인용하지 말아야 한다.
“좋은 글은 언어의 전이가 있고, 공감각 표현이 들어 있고, 구체적 묘사가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간과했다. “말과 말이 어긋나는 지점에서” 나의 언어는 미끄러지고 나동그라지면서 “행간을 이탈한 생각”이 가득하다. 단어와 단어의 사이를 비틀고 문장과 문장의 사이를 구겨 놓으면서 글을 쓰는 일상에서 이런 식의 조어법이 사용된다면 일제히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특히 정치와 연관된 글을 쓰는 처지에서 오늘날 우리가 문학의 정치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문학의 정치적 영향력을 뜻하기보다는 ‘정치적인 삶의 문학적 사유’ 혹은 ‘정치적 사유의 문학화’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작품이 사회 정치적으로 영향을 끼친다거나, 사회 정치적 시대상황이 예술작품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 언어에 관한 기존의 관점들에 노정되어 있는 것처럼, 문학 언어는 특수한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고 간주하거나 문학의 언어가 정치적인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기대하는 방식은 그것을 항상 ‘보이지 않는 것’, ‘암호화된 것’, ‘개별적인 것’으로 잔존하게 만든다.
그러나 만약 문학 언어라는 형식이 우리들의 삶에 어떤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보이는 것’, ‘판독된 것’, ‘보편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구원의 방식이다. 문학 언어가 보편적인 구원을 수행하는 자리에서, 그 언어는 ‘문학의’ 언어가 아니라 ‘아무나의’ 언어가 된다. 따라서 문학 언어의 정치적 가능성은 우선적으로 ‘문학의 언어’에서 ‘문학과 언어’로 옮겨가는 인식론적 전환을 통해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를 매개로 행사하는 폭력은 두 가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공론장의 파괴’와 ‘자기검열의 기피화’다. 나의 언어 습벽에 대한 자기 검열이 절실하게 스며든다.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다, 공업용 미싱으로 입에 오바로꾸를 쳐야 한다는 말도 오래 전에 청치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요즘 정치판에서 들리는, 따뜻한 곳만 찾아다니는 철새, 먹이를 찾아 기어 나오는 바퀴벌레, 낮술 먹었나, 육모방망이로 뒤통수를 빠개야 한다 등의 언어는 평화의 언어가 아니라 폭력의 언어다. 탄핵 정국에서는 실제로 야구방망이가 등장하기도 했다. 정치의 언어는 폭력의 언어가 아니라 평화의 언어여야 한다.”는 점에서 나의 여성 비하적 언어, “이 세상 여자들의 쓸모가 밤에만 있지 않다”는 헤드라인 타이틀은 매우 부적절한 통속의 밑자락에 있어야 할 것들을 건저 낸 것에 다름 아니다.
인간이 만약 표현적 존재라면 인간의 삶은 하나의 통일체이지 이성과 감성, 의지 등으로 분리되어, 하나가 다른 것들을 지배하거나 전혀 별개의 능력으로 발산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사유, 이성에 의해 극복되어야 하는 한갓 자연적인 것이 아니며, 인간은 이성이 부가된 존재로서 자연적인 것을 지배해야 하는 그런 존재도 아니다.39) 따라서 인간의 느낌은 그 자체로 인식의 양태이며, 사유의 내용은 그 느낌에 이미 내재해 있다.
헤르더는 느낌과 이성성을 그렇게 분리된 능력으로 고착하지 않는다. “충동은 우리의 실존을 추동하는 힘이고, 우리의 가장 고귀한 인식에서도 그런 힘으로 남아야 한다.”
이 반성문과도 글을 쓰는 이 시간의 지난 삶을 반추해 보건대, 평범하게 산 것 같지는 않은데 딱히 드러낼만한 것도 없다. 언어를 줍는 일이 찌릿할 뿐이다. '벌써'와 '아직'이 버무려지는 새벽 4시쯤을 이겨내고 있다. 지금 이 시간 나는 서울 하늘에 바람(風)과 바람(望)을 거는 중이다.